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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책정리] 기학(氣學)의 모험 1(하)
이태형 at 2010-06-2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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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학(氣學)의 모험 1

김교빈 이정우 이현구 김시천 지음. 들녘. 1987.

(이하는 상기 책을 정리한 내용입니다.)

 

100p 그렇다면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한 생명이 생겨나고, 어디서부터인가 바람이 건듯 불어오며,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꽃이 피는 자연의 오묘한 변화는 왜 생기는 것일까? 둥지에 앉았던 종달새가 풀쩍 뛰어오르기도 하고 연못 속 잉어가 헤엄쳐 가다가 갑자기 방향을 바꾸거나 물 위로 솟구치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의 움직임을 일으키는 존재는 누구인가? 서경덕은 그러한 변화의 원인이 바로 기 자체에 들어 있다고 보았다. 서경덕은 이러한 변화에 대해 기 스스로 그렇게 하는 것인 동시에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명백하게 대립적인 개념이다. 스스로 그렇게 한다는 것은 주체적 의미가 담긴 능동적인 행위이며 그 행위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우연적인 의미가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된다는 말은 수동적인 행위이며 아울러 필연적인 의미가 들어 있다. 이처럼 서경덕은 기 자체에 능동성과 필연성(수동성)이 같이 들어 있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변화는 기의 능동적 작용인 동시에 수동적이며 필연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이 점은 앞에서 보았단 장재와 매우 다르다. 장재는 “태허에는 기가 없을 수 없으며, 기는 모여서 만물이 되지 않을 수 없고, 만물은 흩어져 태허가 되지 않을 수 없으니 이 법칙을 따라 나고 드는 것은 모두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처럼‘······하지 않을 수 없다’든가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된다’는 표현은 모두 변화의 필연성에 대한 설명이다. 하지만 서경덕은 그러한 변화의 필연성을 말하면서도 그 안에 기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가 되는 능동성을 부여한 것이다. 이 같은 차이는 율곡 이이로 이어지면서 사회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인간의 주체적 행위를 설명할 근거가 되기도 한다.

101p 서경덕은 이러한 생각을 자신만의 독창적 표현인 ‘기자이機自爾’라는 말로 표현했다. ‘기자이’는 장자가 “사람의 뜻에는 기機가 있기 때문에 묶어두려고 해도 어쩔 수 없다. 뜻이란 돌고 구르는 것이어서 스스로 멈출 수 없다.(意者其有機 緘而不得已邪 意者其運轉而不能自止邪 :莊子)”고 한 말에 곽상이 해설을 붙이면서 “스스로 그러할 뿐이기 때문에 알 수 없다(郭象注: 自爾故不可知也)”고 했는데, 이 글에서 장자의 ‘機’라는 표현과 곽상의 ‘自爾’라는 표현을 합성한 개념이라고 짐작 된다. ‘機自爾’란 기틀이 스스로 그러할 뿐이라는 뜻이며, 이 말에 나오는 ‘機’는 변화를 일으키는 시간적 계기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機’란 그때에 이르면 그렇게 바뀔 수밖에 없는 시간적 필연을 뜻하는 것이다. 꽃이 필만 할 때가 되어 꽃이 피는 것이고 바람이 불만 할 때가 되어 바람이 부는 것이며, 한 생명이 태어날 만한 때가 되어 태어나고 죽을 만할 때가 되어 죽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 모든 변화는 일순간도 정지해 있지 않으며 끊임없이 이어지는 연속의 상태다. 하지만 그 변화를 시간적으로 나누어 본다면 각각의 변화가 모두 나름대로의 시간적 계기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변화를 존재론적인 관점에서 보면 태어남도 죽음도 그저 바뀌는 것일 뿐 슬픈 이유도 기쁠 이유도 없다.

서경덕은 이처럼 철저히 존재론적 관점에 서 있었다. 그래서 우주자연의 모든 변화를 기가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과정으로 보았으며, 그 변화는 시간적인 계기를 통해 나타나는 것일 뿐으로, 어떤 시점이 되면 기가 스스로 그렇게 작용하는 것이고 아울러 어쩔 수 없이 작용하는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107p 이이

110p 이황은 리를 중시했고, 이이는 리와 기를 함께, 서경덕은 기를 중시했다.

110p 리는 사물의 원리이고 기는 그 원리를 담아내는 그릇이다. 비유한다면 리는 이상이고 기는 그 이상을 드러내는 현실인 셈이다. 이상은 추상적이지만 현실은 구체적이기 때문에 이상과 현실은 다른 문제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떠한 이상도 현실은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 이상이 현실에서 실현될 때에만 그 의미를 다할 수 있고 현실 또한 비로소 가치를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이이는 만물의 궁극원리라고 하는 태극도 변화 속에서만 파악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음양이 변하고 바뀌는 가운데 태극의 이치가 들어 있다”고 했고, “음양이 있기 이전에 태극만 혼자 있는 때는 없다”고 했다.

물론 사람이나 사회에 따라 이상의 내용은 달라진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회의 이상이 다르며 군인과 학생의 이상이 다르다. 하지만 모두 바람직한 것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본다면 그 이상 속에 담긴 가치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이는 둥근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 모양이 둥근 모습이 되고, 모난 그릇에 물을 담으면 물 모양이 모난 모습이 되지만, 그 속에 담긴 것이 모두 물이라는 점에서는 같다고 했고, 큰 병이나 작은 병이 크기는 다르지만 그 속에 담긴 공기는 같다고 했다.

이런 생각에서 이이는 리는 형체가 없고 기는 형체가 있기 때문에 “리는 만물에 통하지만 기는 막힌다(理通氣局)”고 했다. ‘리가 만물에 통한다’ 는 것은 리의 보편성을 말한 것이고, ‘기가 막힌다’는 것은 기의 특수성을 말한것이다.

이 표현만 보면 리는 현실의 제한성을 넘어선 보편성을 지닌 반면, 기는 그렇지 못하므로 결과적으로 리보다 기를 낮추어 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리와 기가 묘하게 함께 어우러져 있는 상태(理氣之妙)”를 강조한 점에서 본다면 이이가 생각한 기는 결코 리보다 낮은 개념이 아니다. 아무리 위대한 이상도 현실에서 실현되는 않는다면 의미가 없다. 물론 이상은 사회든 사람이든 구체적인 현실에 대해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 현실이 올바른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규제하는 힘을 갖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상이 현실보다 더 우월한 것은 결코 아니다.

또한 이상과 현실의 만남이 늘 조화로운 모습만은 아니며, 더구나 현실은 항상 변한다. 이상이란 바로 항상 변하는 그 구체적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과 현실이 잘 맞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 그런 경우 이상을 바꿀 수 없으므로 현실을 고쳐서라도 이상을 구현해야 한다는 것이 이이의 생각이었다. 바로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현실을 바꾸려는 이이의 실천이 나오게 된다.

112p 현실을 바꿀 수 있다는 이이의 철학은 어떠한 논리에서 나오는가? 이이는 “저절로 그러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실천을 통해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법칙(自然而然者 天道也 有爲而然者 人道也)”이라고 했다. 자연의 변화는 누가 시켜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이는 자연의 변화에 대해 “아무도 그렇게 시키지 않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성리학자들은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이므로 자연의 변화 속에서 변하지 않는 불변의 도덕법칙을 찾으려 했다. 이 도덕법칙이 성리학자들이 말하는 太極이요 道요 理였다. 그러나 자연에 대한 주관적 도덕적 이해를 거부하고 자연의 입장에서 자연의 변화를 보려 한 학자들이 서경덕 이이였다.

이이는 모든 변화가 음양이 바뀌는 순환에 불과하며 음양 또한 하나의 기일 뿐이라고 했다. 이처럼 모든 변화를 기가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에 서경덕이 만든 機自爾라는 말을 가져다 사용하고 있다. 기자이란 어떤 순간에 이르면 저절로 그렇게 되는 현상을 설명하는 말이다.

사실 모든 변화는 시간적 단절 없이 연속으로 일어난다. 다만 끊임없이 이어지는 변화지만 어떤 순간에 이르면 그것을 계기로 눈도 오고 꽃도 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변화들은 자연의 입장에서 본다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필연적 현상인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것도 필연적인 변화법칙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배고프고 피곤하고 늙어가고 호오에 고개가 돌려지는 인간의 생리적 감각적 특성에서 오는 자연스런 모습은 자연의 일부분이기에 나타날 수밖에 없는 본성이며 필연의 변화이다.

113p 그런데 인간에게는 자연의 필연법칙을 넘어서는 힘이 있다. 늙어가는 것을 어쩌지는 못하지만 꾸준한 운동과 섭생을 통해 젊은이 같은 건강을 지닐 수도 있고, 아무리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도 먹을 것을 주되 발로 차서 준다면 그런 대접을 받기보다 굶어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날 굶주렸으면서도 자기가 힘들여 얻은 소중한 먹거리를 더 불쌍한 어린이나 노인에게 기꺼이 주기도 하고, 부모는 자기가 헐벗고 춥더라도 자식을 따뜻하게 보호하는 것이다. 심지어 소중한 생명을 버려가면서까지 지하철에 뛰어들어 남의 목숨을 구하기도 한다.

사실 이 같은 행동은 모두 인간이 지닌 생리적 본성과 어긋난 행동이며 자연의 필연법칙에서 벗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자신이 지닌 생리적 한계를 벗어난 행동 속에 사람다움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114p 이이는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며 실천을 통해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은 인간의 법칙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에게만 있는 이러한 힘은 무엇이며 어디에서 오는가? 이 힘은 인간이 지닌 의지에서 오며 그 같은 의지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마음에 들어 있는 도덕적 능력이다. 이 점이 이이를 서경덕과 달리 도덕론자로 파악할 수 있게 하는 부분이다.

114p 이처럼 자연의 본질을 어찌할 수 없는 필연성으로 파악하면서도 그 필연성을 넘어설 수 있는 능동성을 인간의 본질로 파악한 이이의 생각은 인간의 마음 작용에 대한 이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사단칠정논쟁을 하다가 덧붙여 벌어진 인심도심논쟁에 그 같은 이이의 생각이 잘 담겨 있다.

두 사람의 주장을 크게 나눈다면 성혼은 이황의 주장을 지지했고 이이는 기대승의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이 논쟁은 4단7정 문제에만 머물지 않고 인간이 지니고 있는 욕심 섞인 마음과 순수한 마음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다. 이 경우 욕심 섞인 마음을 인심人心이라 하고 순수한 마음을 도심道心이라 한다.

115p 인심과 도심이 처음 나오는 『서경』에서는 “인심은 위태롭기 쉽고 도심은 잘 드러나지 않으니, 오직 정성스럽게 하고 흔들림이 없게 해서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그 뒤 주희는 『중용장구』서문에서 “인심은 기로 이루어진 사람 몸속에 들어 있는 사사로운 욕심에서 나오고 도심은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은 올바른 천성에서 나오기 때문에, 인심은 위태로워서 불안하고 도심은 미묘해서 보기가 어렵다”고 했다. 人心은 사람의 생리적 욕구와 관련된 마음이며 먹고, 마시고, 쉬고 싶은 생리적·감각적 욕망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그러나 道心은 이와 다른 순수한 도덕적 욕망이며 떳떳하고 싶고, 바르고 싶고, 남을 돕고 싶은 욕망이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사실 이 두 가지는 모두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지니는 욕망이지만 두 욕망의 결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물론 먹고 마시고 쉬고 싶은 욕망이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먹고 마시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더 맛있는 것을 찾게 되고, 쉬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더 편한 자리를 찾게 된다. 비록 마음이 하고자 하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해도 배고플 때 음식을 보고 입에 침이 고이듯 자기도 모르게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인심은 결과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지 않게 될 소지가 많으며, 따라서 도심을 따른 행동은 결과가 항상 도덕적이지만 인심을 따른 행동은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주희의 생각은 맹자의 성선설에 근거를 두고 있다. 주희는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인심은 기로 이루어진 사람 몸속에 들어 있는 사사로운 욕심에서 나오기 때문에 기를 악의 근원으로 규정했던 것이며,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는 인심 속에 들어 있는 욕심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116p 그 뒤 많은 학자들이 인심·도심에 대한 여러 해석과 함께 제각각의 수양 방법을 내놓았다. 이이와 성혼의 논쟁도 각기 다른 해석에 따른 것으로서 성혼은 이황의 생각을 바탕으로 도심은 4단에 해당하고 인심은 7정에 해당한다고 했다.

그러나 이이는 4단7정은 인간의 순수한 본성과 그 본성을 밖으로 드러낸 감정의 관계를 따지는 문제지만, 인심·도심은 그 두 가지에 의지까지 관련된 문제라고 했다. 그러니까 사람을 주재하는 것은 마음이며, 마음이 움직이기 이전은 성性이고 움직여서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정情인데, 마음이 움직여서 드러난 이후에는 의지의 문제가 된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마음은 하나이므로 인심과 도심도 두 마음이 아니라 어떤 마음에서 시작하여 어떤 마음으로 끝났는지 따지는 문제일 뿐이라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에 대해서도 정신적인 것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모두 기의 변화이며, 리는 그 기의 변화 속에 담길 뿐이라는 입장에서 기발이승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을 주장했다. 이것은 이황과 논쟁을 벌였던 기대승의 주장을 더 분명하게 체계화한 것이다.

116p 그렇다면 인심과 도심이 어떤 마음에서 시작하여 어떤 마음으로 끝났는지 따질 수 있는 문제일 뿐이라는 이이의 주장은 앞에서 살핀 자연과 인간의 차이에 대한 이해와 어떤 일관성이 있을까? 이이의 생각대로라면 인심과 도심의 관계는 도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 인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 도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 인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의 네 가지가 있다.

그러나 도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는 완전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며, 인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당한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도심에서 시작하여 인심으로 끝나는 경우와 인심에서 시작하여 도심으로 끝나는 경우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순수한 마음에서 남모르게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있었다고 가정하자. 어려운 집에 몰래 쌀을 갖다놓기도 하고 소년소녀 가장을 위해 익명으로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다가 동네 사람들이 이렇게 훌륭한 사람을 찾아 상을 주자고 했고 마침내 어렵게 찾아내게 되었다. 그러자 소식을 들은 신문기자들이 몰려들고 방송에서 인터뷰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점점 우쭐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이 기회에 시의원이나 구의원에 나가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 같은 경우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하여 욕심 섞인 마음으로 끝난 예다. 이처럼 남을 돕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시작한 일도 얼마 지나면 거기서 생기는 이익에 눈이 가게 되고 그래서 나중에는 욕심 섞인 마음이 순수한 마음을 누르게 되는 것이 필연법칙이다.

그러나 반대 경우도 얼마든지 있다. 처음에는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는 인정도 받고 그렇게 해서 정치에 입문해볼 생각으로 여기저기 돈도 보내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척했다고 하자. 신문에도 나오고 방송에도 나오는 재미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다가 자신에게 작은 도움을 받은 사람한테서 정말 감동적인 감사 편지를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얼마나 큰 행복이 되는지 알고부터 마침내 전보다 더 많은 도움을 베풀면서도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 같은 마음의 움직임을 이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처음에는 욕심 섞인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순수한 마음이 욕심 섞인 마음을 누르게 된 예다.

118p 사람은 누구나 필연법칙에 지배를 받는 생리적이며 감각적인 욕구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위대성은 자신의 의지적인 노력으로 이 같은 필연성을 극복할 수 있다는 데 있다. 그래서 욕심 섞인 마음에서 시작했어도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이는 자연의 필연법칙과 이를 넘어설 수 있는 인간의 능동적인 능력을 마음 작용을 이해하는 데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그리고 이 같은 생각에서 인간의 욕심 섞인 마음이 사람마다 다른 개인의 기질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교육을 통하여 그 기질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교기질嬌氣質을 주장했다.

118p 그렇다면 이 같은 이해가 사회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가? 기본적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은 자연 안에 있으며, 따라서 사람이 만든 사회 또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다. 그런 점에서 이이는 사회가 창업創業-수성守成-쇠퇴衰退의 역사적 필연과정을 거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이는 사회의 주체가 능동적 실천을 통해 자신을 바꾸어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 같은 인간의 의지적 실천을 바탕으로 쇠퇴기에 접어든 국가 또는 사회를 다시 새롭게 만들 수 있다고 보았다. 이것이 바로 이이의 경장론更張論이다.

120p “정치란 때를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하며 일은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힘쓰는 일이 가장 긴요하다.(『만언봉사萬言封事』)”고 했고, “어떤 상황에 가장 알맞게 하는 것은 때에 따라 끊임없이 바꾸면서 법을 만들고 백성을 구하는 것(『萬言封事』)”이라고 했다. 이이에게 ‘시의’란 시대적 요구에 대한 파악이었으며, 자신이 가진 역사의식이자 시대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경장을 통해 바꾸어야 할 것과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이이는 바꾸어야 할 것은 법률이나 제도이고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어진 정치나 삼강오륜 같은 도덕법칙이라고 했다. 즉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이념이고 바꾸어야 할 것은 그 이념을 드러내는 도구인 셈이다. 이 같은 생각은 앞에서 보았던 이통기국理通氣局과 이기지묘理氣之妙에서 나온 당연한 주장이다. 이념은 보편적인 것이어서 바뀌지 않는 것이고 이념 실현을 위한 방법들은 특수한 것이어서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어떠한 이념도 실현방법이나 실현되는 현실을 떠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이의 생각이었다. 이이가 볼 때 정치나 국가의 존재 이유는 백성을 이롭게 하고 편하게 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경장의 목적 또한 당연히 백성을 위하는 데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경장이란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래된 법이나 제도를 현실 조건의 변화에 따라 바꿈으로써 그 폐단을 없애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이었으며, 이를 통해 사회의 이념적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경장의 기준은 무엇인가? 이이는 어떤 일이 때에 맞는지 안 맞는지는 공론公論에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마음속으로 옳다고 여기는 것이 공론이며 그러한 공론을 국시國是라고 한다. 국시란 사람들이 함께 모여 논의하지 않아도 모두 옳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익을 주겠다거나 두려움에 떨게 만들어서 의견을 모은 것이 아니면서도 어린아이까지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것이 국시이다”고 했다.

공론이란 다수의 의사를 뜻하는 여론과 다르다. 이는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이며 정당성의 문제이고, 임금이나 권력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백성과 합의해서 이끌어낸 것이다. 바로 이 점에 공론의 의미가 있으며, 공론이 없는 나라는 망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이이는 공론이 조정에 있으면 나라가 잘되지만, 조정에는 없고 마을에만 있으면 나라가 어지러워지며, 조정이나 마을 어디에도 공론이 없으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다. 그래서 공론이란 나라를 존재하게 하는 원기元氣라고 했다.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는 반드시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길을 넓혀야 한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생각에서 나온 주장이다. 이이는 특히 이러한 공론의 구체적인 담당자로 사림士林을 꼽았다. 사림이란 자신의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오직 옳고 그름만을 생각하는 양심적 지식인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 나라의 기대를 건 것이며, 이런 면에서 사림도 국가의 원기라고 했다.

122p 이이는 일생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았으며, 그의 사회개혁론 또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선조에게 올린 『성학집요』에서 “임금이 있으려면 먼저 나라가 있어야 하고 나라가 있으려면 먼저 백성이 있어야 한다. 임금은 백성을 하늘처럼 여겨야 하지만 백성이 하늘로 여기는 것은 먹을 양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백성이 그들의 하늘을 잃으면 나라가 의지할 곳이 없게 됨은 불변의 진리다”고 했다. 이처럼 이이는 백성이 먹고 살 수 있도록 보장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123p 이이의 학문은 훗날 실학사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실학자들은 이이와 마찬가지로 도덕 수양이나 매끄러운 글쓰기보다 사회와 백성에게 실제 도움이 되는 현실성을 추구해간 사람들이다. 이이의 글에는 실實이라는 글자가 많이 나온다. ‘실’은 참다운 것. 바른 것. 쓸모 있는 것. 증거 가능한 것으로, 빈 것, 헛된 것, 거짓된 것, 내용 없이 겉만 꾸미는 것 등의 반대 개념이다.

이이는 가장 중요한 바탕으로 거짓 없는 참 마음을 강조했으며, 이러한 마음을 가졌을 때 비로소 실질적인 성과가 나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동호문답 東胡問答』에 ‘참된 일에 힘쓰는 것이 자신을 닦는 가장 중요한 요점’임을 밝힌 「論務實爲修己之要」라는 글을 썼고, “사람이 뜻을 세운 뒤에는 실에 힘쓰는 일만 한 것이 없다(立志之後 莫如務實)”고 했다.

또한 이이는 다른 학자들이 성인이 되기 위한 수양방법으로 마음의 경건성을 유지하는 거경 居敬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는 궁리 窮理만을 강조한 것과 달리, 힘써 실천한다는 뜻에서 역행 力行을 덧붙였다. 이처럼 이이는 ‘무실 務實’과 함께 ‘力行’을 강조함으로써 뒷날 도산 안창호의 ‘무실역행’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140p 송대 성리학은 그 이전의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여서 정교한 철학체계를 갖추게 됩니다. 이때 많은 부분을 불교나 도교에서 빌려온 것이지요, 특히 리 개념은 불교에서 많이 쓰이는 내용을 가져다가 사용한 겁니다. 예를 들어 화엄종에서는 깨달음의 단계를 설명하면서 ‘理無碍-事無碍-理事無碍-事事無碍’라고 했지요, 또 성리학 성립 이전의 개념들 가운데 리와 유사한 개념이 뭐가 있을지 생각해보면 그것은 道나 天일 것입니다.

하지만 고대의 도나 천 같은 개념이 성리학의 이기론처럼 다른 개념과 쌍을 이룬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기라는 개념이 고대에서는 완전히 성숙한 개념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대에도 노장철학을 중심으로 한 일부 사상가들은 도나 천의 움직임을 기로 설명하기도 했지요.

성리학에 이르면 리와 기는 쌍을 이루는 대립개념처럼 쓰이기 시작합니다. 성리학 뒤에 나온 양명학에서는 성性 대신 심心을 끌고 나왔으면서도 여전히 리기 개념 모두를 쓰고 있습니다. 왕양명이 심에 주목한 이유는 도덕의 구체성, 실천의 구체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지요. 그냥 주자처럼 도덕의 근원 법칙으로서의 리만 애기하면 이것은 뼈다귀와 다름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구체성 없는 관념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도덕법칙의 구체적인 활동 근거가 우리 안에 있다고 보고 그것을 심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때의 심은 理이기도 하고 동시에 氣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양명학에서는 性卽理라는 말과 心卽理라는 말을 같이 쓰는 것이지요. 이런 차원에서는 리와 기가 같은 것이기도 합니다. 양명학은 주로 정명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주자학은 정이천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고대부터 중심 개념이 천이나 도였다가 리나 심으로 바뀌어 가면서도 기라는 개념은 끊임없이 그 내연과 외포를 넓혀갔던 것입니다. 심지어 서구 문물이 마구 들어오면서 동양의 온갖 것들이 무너져갈 때에도 기를 서양 용어인 에테르 같은 개념으로 바꾸어보려고도 했고, 우리나라의 최한기는 넓혀진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틀거리를 기라는 사고를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보려고 했던 것이죠, 어떤 의미에서는 리보다 기 개념이 훨씬 유효하게 쓰이고 있는 것 같아요 만일 저에게 “왜 그렇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기가 훨씬 구체적이고,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신축성이 훨씬 높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143p 기철학은 분명 동양 문화권에서 주류는 아니었던 사유체계입니다. 만약 기로 설명하는 논리가 주류를 이루었다면 그것은 봉건사회에서 다스리기 힘든 논리를 양산해내는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리를 사회적 차원에서 이해해본다면, 그것은 완벽한 위계질서의 사회 속에서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지켜야 할 의리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리를 중시하는 사유체계는 사회 전체를 일관되게 해석함으로써 강한 통제력으로 장악해갈 수 있는 논리를 제공해주는 틀이기도 했지요. 이런 점 때문에 성리학을 가리켜 조선 중기의 이데올로기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의 논리를 펴는 사람들은 실질적으로 사회의 주류가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