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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책정리] 인간생태보고서
이태형 at 2012-06-08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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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생태보고서

: 먹고, 싸우고, 사랑하는 일에 관한 동물학적 관찰기

안나흄스저 박종성역 웅진지식하우스 2010.5.17.

ISBN 978-89-01-10807-0

(이하는 상기한 책을 읽다가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어서 정리한 내용입니다)





344p AM 7:48 남 도와주기

커첸과 나는 차에 올라타고 공원으로 향한다. 교차로에 이르자 긴 다리를 가진 이 녀석이 좌석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나는 브레이크를 서서히 밟는다. 다른 차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필즈버리로 간다. 이 운전이라는 일은 내가 속한 종이 가지고 있는 협력적인 천성의 결과물이다. 만일 오소리가 차를 몰고 있다면 정지 신호에서 기다리지 않으리라. 단독으로 생활하는 동물들은 상대를 신뢰할 필요가 없다. 윤리적으로 행동하려고 허비할 에너지가 없는 것이다. 오소리라면 교차로를 그냥 통과할 것이다. 이에 항의하는 동족 오소리를 그대로 깔아뭉개고.



인간들은 서로 협력을 한다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이다. 역사가 이어지는 내내 인간들은 동물을 사냥하고 식물군을 찾아내기 위해 협력해야 했으며, 망을 보거나 방어 행위를 할 때, 그 밖에 짝짓기 기회를 잡거나, 다른 인간 무리들을 몰아내기 위해 동맹관계를 맺고자 할 때도 팀워크에 의지했다. 우리는 오소리가 그러는 것처럼, 평소에는 혼자 돌아다니다가 짝짓기 철이 돌아오면 일시적으로 쌍을 이루는 식의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에겐 함께 일하는 능력이 내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우리의 친척인 침팬지들도 협력 활동을 한다. 다른 종들에서도 이런 특성을 찾아볼 수 있다. 몸무게가 1킬로그램도 안 되는 미어캣에서부터 0.5톤이나 되는 병코돌고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협력적인 행동을 필요로 하는 특정한 생활양식이 있다. 우리가 채택하고 있는 생활양식도 그중 하나다.



무엇이든 공유하는 행동은 인간 상호 소통의 근본을 이루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 종일 이를 의식하지 않고 행한다. 어떤 특정한 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인간 무리들은 행동의 규칙들을 창안해냈고 그것들을 지킨다. 다소간 그렇다(누가 보면 잘 지키고 안 보면 가끔 위반한다). 근본적인 행동 원칙들에는 일관성이 있다. 일반적으로 같은 무리 내의 인간들은 서로를 죽이지 않는다. 무리의 구성원들은 다른 인간의 짝과 교미를 하지 않고, 또 그의 도구를 훔치지 않는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런데 이 규칙들이 꽤나 괴상해질 때도 있다(지하철 안에서는 껌을 씹지 말라든지, 일요일에는 정오가 될 때까지 위스키를 팔아서는 안 된다는 등). 여하튼 모든 규칙들은 협력하는 무리 내에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것이다. 어떤 무리는 규칙들과 함께 위반 시의 벌칙들을 글로 적어놓고 있다. 다른 무리들, 주로 생존형 무리들이 되겠지만 이들은 머릿속에 규칙이 들어 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사안 하나 하나 하나에 벌칙을 적용한다.

 

 

 

전반적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행동을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인간들은 자주 무리 내에서의 조율된 노력을 요하는 일들을 벌인다. 전쟁을 하거나, 은신처를 짓거나, 먹을 것과 돈을 바꾸는 일들이 그것이다. 인간들은 이런 일들을 할 대 누구와 하느냐에 각별한 관심을 보인다. 나는 나를 이용해먹은 사람과는 두 번 다시 거래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화장실 공사를 마무리 짓지 않고 가버린 시공업자 같은 사람들 말이다. 그리고 해변에서 개를 산책시키는 (법정) 시간을 계속 확보하고자 할 때는 개 혐오가가 아닌 개를 사랑하는 인간들과 같이한다.



인간이 왜 커다란 뇌를 가지게 됐는지에 관한 주요한 이론 하나를 떠올려보자. 우리가 다른 누구에게 베푼 혜택과, 우리가 다른 누구로부터 받은 혜택을 일일이 기억하려면 엄청나게 많은 뉴런이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론은 침팬지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 터이고, 상대적으로 큰 뇌를 가진 까마귀나 돌고래, 늑대, 기타 사회적 동물들도 포함될 수 있다. 인간들이 그런 것처럼, 침팬지들도 자신들의 영역을 지키려면 협력을 해야 한다. 그뿐인가. 먹이를 찾아내고, 무리 내의 힘센 녀석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침팬지들은 또한 자신들만의 규칙을 지킨다. 이를테면 “대장이 총애하는 암컷과 노닥거리지 마라”, “딴 녀석이 쥐고 있는 먹을 것을 빼앗지 마라” 등이다. 그렇지만 이 녀석들도 할 수만 있다면 남의 것을 속여서 가로챈다. 그런가 하면 자기 앞에 놓인 일에 따라 도움이 될 우군을 신중하게 선별한다. 대장을 축출하고 싶은 수컷은 결의에 찬 다른 수컷을 동지로 뽑는다. 물론 소심한 녀석과는 팀을 이루지 않는다. 동물원 실험에서, 침팬지는 특정한 어떤 문제에 유달리 강한 동료들이 누구인지 죄다 파악하고 있었으며, 문제가 주어질 때마다 거기에 적합한 파트너를 선택하곤 했다. 침팬지들은 또한 어떤 친구가 자신에게 잘해주었는지, 먹을 것을 나눠주었는지를 일일이 기억했다. 이렇듯 복잡한 사회생활을 하려면 대용량의 뇌가 필요하다.



만약 이 모든 협동성이란 것이 다소 몰인정하고 계산적이며 너무 야박하게 느껴진다면, 그도 그럴 법하다. 선善을 재는 불변의 척도인 이타주의가 알고 보면 ‘자기이익’을 위한 것이냐,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이냐 하는 질문의 답은 아직 나와 있지 않다. 이타적 행동이란 나 자신으로 하여금 노력과 자원을 쓰게 하고 때로는 위험까지 감수하도록 하지만 정작 자신에게는 어떤 이익도 돌아오지 않는 그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궁극적으로 나를 이롭게 하지 않는 이타적 행동을 찾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자전거에서 넘어진 아이를 보호하려고 거리로 뛰어나가 차량들을 정지시켰다고 하자. 나는 나 자신을 희생시켜 나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아이에게 은혜를 베푼 것이다.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행동은 어리석은 것이다. 나라는 유전자의 총체는 셰비서버번(미국산 SUV의 이름-옮긴이)에 치어 산산조각이 났을 수도 있었다. 내 DNA를 조금도 갖고 있지 않은 한 어린아이의 생명을 구하려고 말이다. 이런 종류의 행동에는 보상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보상이 있을 수도 있다. 이타주의가 결코 자기를 버리는 게 아니고, 어떤 면에선 오히려 교활한 장기 투자 전략이라면 말이다. 이 주제에 관한 실험들이 현재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그 결과를 보면 자기 자신을 곧잘 성자라고 생각하는 인간을 낙담시키기에 충분하다. 이타주의에 관한 고전적인 실험이 하나 있다. 한 연구자가 나와 세 인간들에게 각각 10달러씩을 준다. 우리는 그 돈을 가지거나 그중 일부를 공공기금에 출연할 수 있다. 공공기금에 가입하면, 금액이 전부 2배가 된다. 2배로 불어난 금액은 4명의 참가자들에게 똑같이 분배된다. 그래서 극단의 이타주의자라면 언제든지 10달러를 공공기금에 넣을 것이다. 단 1센트도 넣지 않은 인간도 5달러를 더 가질 수 있다. 극단의 ‘자기 지향적’인 인간은 한 푼도 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몫으로 떨어지는 돈은 꼬박꼬박 챙길 것이다. 이 게임의 결과는 문화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대부분의 인간들은 공공선을 위해 실제로 투자를 했다. 참가자들이 직접 대면하지 않고 게임 전 과정이 컴퓨터를 통해서 행해진 경우에도 그렇게 했다. 한마디로 서로 잘 모르는 사이라 하더라도 인간들은 자신의 것을 일부 걸고 협력할 수 있다.

 

이 이야기가 선은 타고난다고 믿는 측에는 반가운 소식처럼 들릴지 모르나, 좋아하기는 아직 이르다. 우선 우리는 우리가 감시를 받을 때 인정 넘치는 행동을 하도록 설계돼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이는 로봇 실험을 통해 입증되었다. 실험에 따르면, 어떤 문화에 속해 있느냐가 그 사람이 얼마나 내놓느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미국인 피실험자들은 자신의 신분이 공개되면 될수록 더 많은 액수를 출연했다. 인간들은 컴퓨터 앞에서보다 다른 인간들과 함께할 때 더 협조적이 되었다. 하버드 대학의 연구팀이 미국인 피실험자들 옆에 컴퓨터를 놓고 화면에 키스멧이라고 이름 붙인 강렬한 푸른 눈을 가진 로봇의 영상을 띄우자, 돈을 내놓는 비율이 29퍼센트까지 뛰었다. 연구팀은 인간의 뇌는 같은 인간의 눈을 스스로에게 각인시키기 때문에, 누군가가 보고 있을 때면 자동적이고 잠재의식적으로 더 큰 선행을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이는 다시, 우리는 주변의 인간들이 나를 이롭게 하기 위해 얼마나 협력해줄 것인지를 테스트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돈의 일부를 쓸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즉 우리 자신의 평판을 높여줄 가능성이 있는 경우에만 실질적인 인정을 베푼다는 것이다.



평판이 이타주의를 추동하는 엔진이라는 점은 이제 확실하다. 나는 대단히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들이 내게 보내는 신뢰와 존경을 중요하게 여긴다. 좋은 평판을 얻게 되면,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우군들을 확보하기 쉬워지며, 내가 위기에 빠졌을 대 그들이 발 벗고 나설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인간의 무리 안에서 무엇인가가 오고 가는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보험 삼아 남을 돕는다.

 

 

 

자, 어쩌면 이런 항변을 할지도 모르겠다, “아냐, 이것은 사실이 아냐. 내가 수표를 보낸 건 그 소녀의 처지가 무척 어려웠기 때문이었어. 그리고 걔는 누가 보냈는지도 모르잖아.” 우선, ‘처지 어려운 소녀’에 관한 구체적인 얘기는 제쳐놓고 말해보자. 인간들은 어떤 형편 곤란한 아이 한 명을 돕는 데는 천 달러를 기부할 수 있지만, 방글라데시에 사는 100명의 아이를 구하는 데는 천 달러를 보내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다. 어째서 그런 차이가 나는가? 처지가 어려운 그 소녀를 돕는 행위는 내게 좋은 평판을 안겨준다. 그러나 슬프게도 100명의 방글라데시 아이들에게 돈을 줘봤자 누가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 아이들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처지 어려운 소녀 증후군’은 우리가 의도하는 바가 생명을 구하는 일에 한한 것이 아님을 입증한다. 다른 뭔가가 더 있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한 어린아이의 목숨을 구하고자 차에 치일 위험을 감수했다고 하지만, 그 목적만이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어쩌면 나는 이타주의 외의 그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도 모른다. 내 안에서 불타오르는 그 느낌 때문에 나는 선행을 하는 것이다.



이타적인 행위를 할 때 이 특출하고도 좋은 느낌이 그 사람의 내부에서 솟아오른다는 사실은 우리가 선행을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보상을 받도록 진화되어왔음을시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뇌 안에 ‘우호적’인 화학물질을 가진 고대 원인들이 협력적인 형태를 보였을 테고, 그 결과 남의 것을 훔치거나 싸우기를 좋아하는 인간들보다 건강한 자손을 더 많이 보았을 것이다. 진화가 집단의 차원에서 작동할 수 있다. 만일 한 집단 구성원들이 공유하고 있는 어떤 특질이 다른 무리를 압도하고, 더욱 다산할 수 있게 한다면 능히 그렇게 될 수 있다. 이른바 ‘집단 선택group selection’ 이란 것인데, 이 메커니즘은 인간에 내장된 ‘남을 돕는 충동’이 어떻게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줄 수 있다. 또한 내가 누군가의 복지를 위해 내 것을 희생할 때 어째서 내 ‘현대적’인 뇌도 기쁨에 겨워하는지를 설명해준다.



내가 어떤 노숙자에게 초코바를 하나 줄 대 내 뇌에서는 정확히 어떤 일이 일어날까? MRI를 통해서 보면, 내 충실한 도파민 수용체에 시동이 걸린다. 마치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즐거운 섹스를 하거나, 기타 장수에 도움이 되는 좋은 일을 할 때와 똑같다. 친절은 명백하게 중독적이다. 그와 동시에 뇌의 다른 영역이 즉각적인 만족을 구하려는 나의 충동을 억제하고 나선다. 그럼으로써 나는 장기적인 결과를 염두에 두고 행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런 뇌 행동은 컴퓨터와 함께 이타주의 게임을 하고 있는 인간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타주의는 오로지 인간 대 인간의 일인 것이다. 만일 우리의 이기적 행동이 마이크로칩에 영향을 준다고 하면, 우리는 진지하게 게임에 임할 것이다.



그럼 이는 원숭이 대 원숭이의 일도 될 수 있을까? 생물학자들은 이따금씩 인간이 하는 방식으로 서로를 배려하는 야생동물들을 목격하곤 한다. 나는 손이 없는 마카크원숭이 한 마리와 정신 발달이 지체된 다른 한 마리에 관한 보고서를 읽은 적이 있다. 원숭이 무리는 도움이 필요한 이 동족들을 친절하게, 그리고 이해하는 태도로 받아들였다. 특히 발달 지체 원숭이는 무리의 규칙을 어기는 것이 허용됐다. 정상적인 녀석이 그랬다면 머리를 한 대 맞았을 법한 위반임에도 그랬다. 원숭이들 역시 다른 누군가를 돕는 일을 기뻐하도록 진화된 것처럼 보였다. 영장류 학자인 프란스 드 발Frans de Waal은 허약한 보노보 한 마리가 동물원을 옮겼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세히 보고하고 있다. 침팬지 우리 주변에서 길을 못 찾꼬 불안에 휩싸여 이리저리 헤매고 있을 때, 새 동물원의 보노보 무리가 다가와서 녀석의 손을 잡고 인도해갔다는 것이다.

 

친절은 또한 고래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돌고래와 고래들은 모두 곤경에 빠진 동료를 돕기 위해 코를 갖다 댄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지난 수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돌고래에 대한 전설도 있지 않은가? 녀석들이 곤경에 처한 인간들을 도왔다는 얘기 말이다. 꽤나 최근의 일도 있다. 한 오스트레일리아 어부는 배가 난파돼서 부유물을 잡고 바다에 떠 있는데, 상어들이 다가와서 주의를 돌자 돌고래들이 나타나서 상어들을 쫓아버렸다고 증언한 바 있다. 그런 얘기들이 사실인지 꾸며낸 것인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또한 인간을 도왔다는 돌고래의 큰 뇌 역시 도파민으로 출렁거렸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자, 어쨌든 나는 지금 개를 태우고 공원으로 가는 중이다. 엄청나게 협력하며, 숲 속에 사는 보노보 가운데 가장 인정 많은 녀석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런데 오소리 한 마리가 오고 있었다.



나는 4개의 정지 신호가 있는 교차로 앞에 도착했다. 내 오른편 차선에는 나이 든 남성이 빨간 트럭 안에 앉아 있다. 왼편에는 젊은 여자 하나가 검은색 해치백 안에 앉아 있다. 여자는 신호가 떨어지자 교차로를 가로질러 제 갈 길을 간다. 이제 남자 차례다. 그런데 그가 앞으로 나가려고 하는데, 젊은 여자 바로 뒤의 은색 세단을 타고 있던 회색 머리의 여자가 차를 급발진 시킨다. 그녀는 멈추지도 않고, 양보하지도 않고, 사과의 미소도 짓지 않는다. 이 여성은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한다. 나이 든 남성의 진로를 막으며 좌회전을 해버린다. 그녀는 트럭 차례를 빼앗았고, 내 차례도 빼앗았으며, 인간들의 귀중한 협력 결과물을 가로채버렸다.



때마침 나는 이런 주제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터라, 저 ‘오소리’의 행태가 궁금한 나머지 그녀의 뒤를 밟아 공원까지 간다. 거기서 개를 풀어놓은 다음, 열려 있는 그녀의 차창으로 다가가서 마음속에 있는 질문을 한다. “겨우 몇 초 일찍 오겠다고,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이유가 뭔가요?” 그녀가 짐짓 당황한 척 입을 벌리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본다. 그러곤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다.



그때 내 맥박은 방망이질쳤다. 나는 큰 위험을 무릅썼다. 협력하지 않은 인간을 벌한 것이다. 다윈 이래 학자들은 배덕자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어떻게 올곧음을 유지할 수 있었는지 숙고해왔다. 이론적으로는 비열한漢이 한 명이라도 있으면 전체 시스템이 와해된다. 은색 세단의 주인은 신호위반을 함으로써, 자기 신호가 떨어지기 전까진 결코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던 픽업 트럭의 운전자에게 그래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이제부터는 그도 위반할 것이다. 그래! 당신 둘 다 규칙을 범한다면 나도 그러는 게 낫겠지! 에라, 가자! 평화도 없고 조화도 없으리니!

 

응징은 협력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응징이란 배벅자들이 사회로부터 받을 우 있는 귀중한 지원을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벌을 가하는 일도 순수하게 이타적 행위처럼 보인다. 나는 위반자와 맞섰다. 그 결과 내가 얻은 것은 덜덜 떨리는 심장과 샐쭉해진 ‘오소리’의 표정이다. 도파민은 전혀 솟구치지 않았다. 왜 나는 공공선을 위해 그런 희생을 해야 하는가? 다시 말하자면, 얼핏 보아선 그런 행동은 생물학적인 파탄과 다름없다. 그러나 역시 다시 한 번 자세히 들여다보면, 위반자를 응징하는 것은 장기적인 전략의 일부임이 드러난다. 그 전략이란 내가 오늘의 스트레스와 내일의 사회적 지원을 맞바꾸고자 하는 생각을 일컫는다. 나는 어떤 위반자를 벌하려고 나섰다. 그럼으로써 나 자신이 신뢰와 고결함에 대한 높은 기준을 가진 인간임을 만방에 알리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양질의 우군을 확보할 수 있고 내 주가는 오른다. 이론은 대략 이렇게 전개된다. 한편 이런 일을 하면서도 어떤 영역 지향성이 작용함을 나는 감지한다. 개똥을 치우지 않는 개 주인에게 다가갈 때, 불안과 창피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부추기는 것은 내 이웃을 위반 행위의 결과로부터 지키고자 하는 결의다. 그러나 나는 내 영역 밖에선 그렇게 빨리 오소리들과 맞서지 못한다.



응징과 관련해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혈액에 테스토스테론이 많으면 많을수록 응징 행위를 더 잘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어떤 위반자가 전기 충격으로 징벌당하는 것을 본 남성들의 뇌에는 도파민이 분비되었다. 비열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한 응분의 처벌을 받는 것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다. 그러나 여성들은 이런 상황에서 도파민 분비가 이루어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벌받는 인간에 대해 가슴 아파한다. 동정심을 관장하는 뉴런들이 작용하여 그녀의 뇌는 고통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어쨌든 협력적 행동에 관한 슬픈 진실은 우리 모두는 내면에 오소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보노보의 탈을 쓰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눈앞의 것만 본다면 정지 신호를 무시하고 달리는 것, 국세청에 허위신고를 하는 것, 형편 어려운 소녀를 무시하는 것이 두말할 나위 없이 가장 좋은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멀리 본다면, 나는 동료 인간들에게 의지해야 할 일이 숱하게 많을 것이고, 그런 경우에 배덕 행위를(최소한 그들의 면전에서 행하는)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한 인간이 규칙을 위반한 대가로 벌을 받을 때 그가 보이는 반응은 사적인 것인 동시에 그 인격과 그 자신을 길러낸 문화의 산물이다. 누군가는 징벌에 대해 거의 신경도 쓰지 않겠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사회적 제재가 정말로 괴로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초기 아이슬란드 사회에서 가장 가혹한 벌은 사형이 아니라 사회적 추방이었다. 범법자는 수년간 공동체 밖으로 쫓겨났으며 다른 인간들의 눈에 띄면 살해당할 수도 있었다. 형기를 채우고 나야 그는 방면됐다. 나는 아이슬란드에 갔을 때 이런 추방자들이 기거했던 곳으로 추정되는 한 장소를 방문했다. 그 형벌의 공포가 생생히 전해지는 것 같았다. 살인죄를 저지른 어떤 범법자는 땅에 내 책상만 한 크기의 구멍을 파고 한겨울을 났다고 한다. 구석에서 솟아나는 물줄기로 목을 축이고 가죽으로 굴을 덮어 눈이 들어오지 않게 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는 얼어붙은 말 시체를 먹으며 지냈다고 한다. 넓고도 혹독한 황야가 이 추방자와 다른 인간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나라면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기 전에 외로움에 지쳐 죽어버렸을 것이다. 동화처럼 들릴지는 모르겠으나, 이는 군집 생활을 하는 원인들의 마음에 크나큰 공포를 불러일으킨 징벌이었을 게다.



나조차도 이런 징벌을 상상하면 마음이 움츠러든다. 나는 대단히 사교적인 인간이다. 재빨리 협력하고, 누가 보지 않더라도 뭔가를 위반할 때는 망설이게 되며, 어떤 응징을 받는다 치면 굴욕감을 느낀다. 그렇게 되면 나는 비참한 오소리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이다.